2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기 - 밀란 쿤데라<배신당한 유언들> 2013/05/26 02:12 by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유머다. 밀란 쿤데라는 본인과 독자 사이에 가장 빈번히 발생하는 오해가 유머 때문이라고 말한다. 소설적 상상력을 인류사회학적 맥락에서 진지하게 해석해 인공 수정에 관한 토론회에 초대된 일이나,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등장인물이 주고 받는 망언을(등장인물의 견해가 곧 저자의 견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탁월한 지적 증거로 인용당한 일 등. 그가 경험한 일련의 사건들은 작가라면, 예술가라면 언제나 겪을 수 밖에 없는 정말로 흔한 몰이해의 상황이다. 원래 사람은 개개인의 내면화된 체험에 기초해서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백 명의 독자가 있다면 백 권의 책이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만약 밀란 쿤데라가 이러한 몰이해의 상황을 심각하고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면 이 책은 무지한 인간들을 성토하는 장이 되었을 것이고 독자의 마음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작가는 담론을 소설사 뿐만 아니라 음악사, 예술사로까지 확대하며 지적 유희를 즐긴다. 그러므로 작가가 유머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본인이 그 대상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행운이나 다름 없다. 작가의 꽁무니를 좇다 과부하가 걸린 독자에게 재치있는 글귀보다 큰 위안이 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친구가 블로그에 글을 썼다가 의도치 않은 반응에 당황스러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의 잉여로운 생활을 기술하며 나는 왜 사는가,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서 산다 따위의 말을 진지함을 가장(이 부분이 중요하다)한 어조로 늘어놓았는데 거기에 달린 답글이 '힘내세요' 였다는 것이다. 나는 유머를 이해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는 밀란 쿤데라의 말을 수정하기로 했다. 유머를 이해시키는 것보다 더 김 새는 일은 없다고.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데 삶에 있어 조금 더 관조적인 자세를 취하는 편이 모두의 정신 건강에 이롭지 않나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도 피카소 전람회에 갔던 경험을 상기하며 '관조하는 행복'에 대해 언급을 했더랬다. '기쁜 듯 하늘로 다리를 쳐들고 있는 사내'를 그리는 '피카소의 행복'과 그것을 상상하는 '밀란쿤데라의 행복'은 거리두기의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예가 아닐까.  




<파뉘르주가 더는 웃기지 않는 날>이 맨 앞자리를 차지한 이유는 그 글이 소설 예술을 이해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마음가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단지 소설일 뿐이고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등장인물의 행동은 작가의 도덕관이나 정치적 입장과 별개일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작가는 다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상한다. 비극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는데서 비롯된다. 도덕적 판단을 보류하는 도덕적 모호성, 유머를 유머로 받아들이는 재치와 너그러움, 여유, 상상력 등.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헤밍웨이의 단편이 도덕 강의로 탈바꿈하거나 카프카를 '종교 사상가'로 정의하는 것과 같이 웃지 못할(이라고 쓰고 웃는다)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 유머의 결핍 못지 않게 곤란한 것은 통념의 희생물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작품을 평가하거나 수용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왜곡과 오해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준다. 번역과 편집의 오류, 유언 집행자의 직무유기에서부터 새로움(새로운 형식, 새로운 문체,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편협한 태도나 작가의 국가적, 사회적, 시대적 고립 등등. 몰이해에는 대단히 다양한 형태와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불가피한 몰이해는 예술의 운명과도 같다. 대중이 원작자의 의도나 작품의 본질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번역가와 편집자가 원작자의 미학적 의사를 최대한 충실히 반영한다든지, 유언 집행자는 고인의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된다든지, 그리고 저작권에 있어서 법적인 보호와 함께 도덕적 책무도 병행되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꾸준히 노력해야할 일이다. 다만 정말로 어쩔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술의 요구가 국가적, 사회적, 시대적 요구와 모순되는 상황은 예술가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는 '인간은 안개 속을 나아가는 자'라고 했다.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볼 때는 과거의 사람들이 걸어간 길 위의 안개도 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은 비단 예술가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것이다. 비평가나 일반 대중들 역시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개인적 결함(몰이해)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 개인성에서 비롯된 몰이해,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시대정신에 부응하기 위한 지극히 통속적인 견해수정이야말로 위험하고 부적절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작품에 대한 의견을 피력할때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아주 작은 위험이라도 감수하고자 했다면 그 의견이 작품의 본질과 다소 벗어나더라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집단 무의식에 동조하지 않아야 한다.





카프카를 고독한 순교자, 성자의 이미지 속에 가두어버린 장본인이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은 작가의 미학적 의도나 작품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이 개인적 친밀도와는 무관함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예다. 친구를 향한 무한한 열정과 애착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브로트는 '카프카학 창시자의 미학적 무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낙인을 얻었다. 불쌍한 카프카, 불쌍한 브로트.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그러나 소설사에서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카프카를 지금의 카프카로 만들기까지 브로트가 보여준 불굴의 정신이라고 해야할까 그 무모함만은 인정해주고 싶다. 만약 카프카가 그렇게라도 알려지지 않고 그대로 묻혀버렸다면 우리에게는 카프카를 재평가할 기회 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책 값을 주고 싶은 만큼만 주라는 말에 해원이 그런다. 그럼 제가 너무 드러나잖아요. 그러자 상대가 이렇게 말한다. 그럼 드러나지 않을 만큼만 주시면 되죠. 
어떤 대상에 값을 매기고 가치판단을 할 때, 그 행위 안에는 나에 대한 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지적ㆍ심미적 소양이나 안목, 가치관, 속물적 경향, 위선적인 면 등. 특히 본인의 소양이나 안목에 자신이 없을 때는 내면의 욕구를 따르기보다 그 방면의 권위자나 다수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곤 한다. 그것은 또한 작품에 대해서 집단적 몰이해의 위험을 안고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의 예술가들이 직면하는 어려움을 생각한다면 용기를 내는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예술을 향유하는 자가 감수해야할 부분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좀 드러나면 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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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덧글

  • 2013/05/26 12:00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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